하늘의 숨결

나의 목자

shilhi 2025. 6. 1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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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나는 자유인이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다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음성을 듣고 누군가의 소리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가난한 나라가 행복지수가 높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데에는 주관적 지표와 객관적 지표가 있습니다.

 

주관적 지표는 행복하십니까?”, “삶에 만족하십니까?” 와 같은 질문에 답을 얻는 것이고 객관적 지표는 소득 수준, 평균 기대 수명, 교육 수준과 같은 측정 가능한 수치들을 기반으로 하는 지표입니다.

예를 들어, 유엔 개발 계획(UNDP)에서 발표하는 인간 개발 지수(HDI)는 소득, 건강(기대 수명), 교육 수준을 종합하여 한 국가의 발전 수준과 국민의 삶의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지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관적 행복도가 높은 나라는 객관적 지표가 낮고, 반대로 객관적 행복도가 높은 나라는 주관적 지표는 낮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지수가 높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 같이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주관적 지표가 높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한마디로 다 같이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남 이 잘되는 배 아픔은 못 참는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자전거도 못 타고 걸어 다니면 별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티즈를 타고 있는데 상대는 벤츠를 타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 박탈감이 사람들로 행복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객관적인 삶의 질이 높아져도,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뒤처진다고 느끼거나, 끊임없이 더 높은 것을 추구하게 되면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기 쉽다는 것입니다.

즉 배고픔은 참아도 배 아픔은 못 참는다는 것입니다.

 

왜 배고픔 보다 배 아픔을 참지 못할까요?

그것은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소비주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와 미디어, SNS 인플루언서들은소유가 곧 행복과 가치의 증명이라고 외칩니다. 최신 스마트폰, 명품 가방, 더 넓은 아파트, 근사한 해외여행 사진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너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핍감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 신상을 가져야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아.", "남들은 다 가는 해외여행, 너도 휴가 때 꼭 가야 해.", "성공한 사람들은 이런 차를 타지. 너의 가치를 증명해봐."

 

여러분 이런 소리는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따라 결정하게 합니다. 만족하는 마음은 패배자의 변명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하고 소비하라고 외칩니다.

 

소셜 미디어(SNS)는 세상의 소리가 가장 극적으로 증폭되는 공간입니다. 잘 편집되고 보정된 타인의 행복한 순간들성공적인 커리어, 화목한 가정, 화려한 인맥은 끊임없이 나의 일상과 비교 잣대가 됩니다.

 

"친구의 승진 소식에 축하 댓글을 달면서, 내 처지는 왜 이럴까?", "저 사람은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 "내 삶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좋아요를 받아야 해."

 

어느덧 우리의 행복은 타인의 인정과 부러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니 나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은 감춰야 합니다.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나를 증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로 소유하고 비교하는 삶을 살 것을 속삭이고 우리는 그것에 매여 계속해서 더 소비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매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자유롭게 산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의 소리에 따라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목자로 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럼 하나님을 목자로 두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부분에서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나의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10:27. 양은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하나님이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가 부족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돈이 계속 채워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족한 줄 안다는 것입니다.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2)

 

세상의 소음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인도합니다. 목자가 양을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듯,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가장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조건적인 쉼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경쟁과 비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정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란스러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분별하게 하며,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3절에서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3)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지치고 상한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공허했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채워지며, 우리는 다시 한번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만 참된 평안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는 우리를 지치게 하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함으로 이끌지만, 성령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진리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신데도 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피하려 하고, 때로는 귀를 막아버릴까요?

 

창세기 6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몸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진 상태,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욕망을 따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배를 섬기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 6-7절에서는 이 육신된 상태를 더 명확히 설명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 말씀은 아주 충격적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 즉 자기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없고, 따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 원수 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알고 이 부분을 공략합니다.

광고와 미디어는 우리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즐겨야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입합니다.

육신이 된 인간은 이 소리가 솔깃합니다. 이 메시지가 더 현실적이고 더 쉽게 만족을 얻게 할 것처럼 들립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소리는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세상의 음성이 지배하는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의 추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공허함 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 내면은 불안, 조급함, 시기, 낙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혼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결국에는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번아웃' 상태, 즉 영혼의 탈진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의 욕망에 잡혀 세상의 소리에 매여 사는 자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8:32에서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더 이상 죄와 탐욕의 종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을 목자로 둔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소리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끊임없는 알림, 성공과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의 외침,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만드는 내면의 속삭임까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쉴 틈 없이 세상의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소음의 파도 속에서, 우리가 의지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소리에 잠식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며 동시에 초대합니다. 우리를 분주함과 공허함으로 내몰아 결국 영혼의 탈진에 이르게 하는 세상의 소리를 넘어, 참된 평안과 회복이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열방의 성도 여러분 지금 당신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의 소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 삶의 평안과 안식을 결정하는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조용히 부르고 계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은 당신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혹시 지금, 당신의 마음이 지치고 텅 빈 것 같지 않습니까?

비교와 인정의 굴레 속에서, 끝없이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지친 당신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쉼과 회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당신의 목자로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이 그분을 목자로 모실 때, 비로소 세상의 소리에서 자유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말할 수 없는 평안과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이 오늘, 당신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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