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전국 초·중·고등학생 대상 학교 폭력 전수조사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전체 응답 학생의 2.1%, 무려 6만 8천여 명이 학교 폭력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11년 만에 최대치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육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마저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백약이 무효한 듯, 학교 폭력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더 폭력적이고 무질서해지는 현상은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됩니다. 개인주의 심화로 인한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 물질주의와 소비 지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즉각적인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교권의 약화로 인한 학교 내 질서 유지의 어려움과 학생들의 규범 의식 교육 부재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각에서는 학생들에게 권리만 강조하고 의무, 예절, 윤리 도덕 교육을 소홀히 한 잘못된 교육 시스템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몰되어, 정작 사람됨을 가르치는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비판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잠언 22장 6절의 말씀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마땅히 행할 길'은 단순히 세상의 지식이나 성공의 기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어적으로 '그의 길(His way)'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말씀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만약 그 '가르침'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다면, '마땅히 행할 길'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함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정직, 사랑, 정의, 책임감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삼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폭력을 억제하며, 불의에 맞서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반대로 그 '가르침'의 중심에 아이 자신이 있다면, '마땅히 행할 길'은 아이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 다른 재능과 성격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따라서 '마땅히 행할 길'은 획일적인 기준이나 부모의 욕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개별적인 특성을 발견하고 그에 맞춰 교육하고 인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치 맞춤옷처럼, 각 아이에게 가장 잘 맞는 길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이는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 볼 때, '마땅히 행할 길'이란 각 아이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각 아이의 고유한 잠재력을 발견하고 최대한 발휘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의 삶을 가르치는 교과서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우리가 늘 성경을 배우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거하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배움의 자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그 말씀을 삶에 깊이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계속 배움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전치사 '에이스'가 의미하듯, 우리를 구원 안에 머물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깨어 가까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세상의 가치에 미혹되어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참된 가치를 분별하고 구원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7절에서 말씀하듯,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은 바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을 통해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고, 의롭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익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특히 이러한 교육은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그 효과가 지속됩니다. 마치 나무의 어린 가지를 바로잡듯,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변화가 어렵지만, 어릴 때부터 말씀을 통해 훈련받으면 평생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바로 '모든 선한 일'입니다. 이것이 잠언에서 말하는 '마땅히 행할 길'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행은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의 자연스러운 열매이며,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선한 행실은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빛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려운 친구를 돕거나, 환경 보호 활동에 참여하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들이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전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의 선행과 나눔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웃을 향해 실천하는 선행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참 잘 실천하지만, 세상 속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 곧 선행의 예배는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해도 안 되고, 이웃만 사랑해도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무게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하나님께 무게를 두는 경향은 보수 기독교, 사람에게 무게를 두는 경향은 진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러한 치우침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출 수 없습니다. 이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도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시편 1:1). 우리는 세상의 악한 흐름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길이요,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지침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학교, 가정, 교회는 협력하여 아이들에게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주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주기 위한 구체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학교 폭력이라는 심각한 문제 앞에서, 피상적인 대책을 넘어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배우고 실천하며, 우리 아이들이 폭력이 아닌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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